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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한국판 투탕카멘, 김수로왕의 저주

한국판 투탕카멘, 김수로왕의 저주. 

 

 

 

“죽음은 빠른 날개를 타고 왕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자에게 다가 갈 것이다."

"Death shall come on swift wings to him who disturbs the peace of the King.”

 

 

 찜통더위가 시작되는 여름이 찾아왔다. 항상 여름 시즌이 되면 온몸을 오싹하게 하는 스릴러물들이 우리의 일상에 가깝게 찾아온다. 여름철 더위를 피하여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납량 특집에 '저주'라는 코드는 빠지면 섭섭한 단골 메뉴이다.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을 일컫는 저주. 우리에게 '저주'라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의 영역으로 그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지만, 신비한 영역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염탐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1924년 투탕카멘의 미라가 들어 있는 관에서 저주의 문구를 보고 6주 후 카나본(Lord C arnarvon)경이 죽은 사건, 그 발굴에 참여한 11명이 7년 안에 모두 사망한 사건, 투탕카멘의 피라미드에서 나온 유물을 소장한 후 악재가 끊이질 않는다는 영국의 레슬리의 사연, 1991년 이탈리아 알프스 빙벽에서 발견된 아이스 맨 외치의 발견과 관련된 일곱 사람의 죽음." 이들의 죽음은 진정 죽은 자들의 저주일까? 아님 우연일까? 누구나 한 번 쯤 그 진실 여부를 떠나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잠을 방해한 이기적인 인간에게 내려진 무시무시한 저주에 대해서 말이다. 죽은 자의 영역에 대한 산 자의 호기심이 초래한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멀리 이집트와 이탈리아를 떠나 한반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옛 이야기 속에도,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내린 저주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국판 투탕카멘, 김수로왕의 저주! 경상남도 김해 김수로왕릉을 찾았다. 오래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로왕의 영정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분수에 넘치는 제사는 재앙을 낳는다.

 

 신라 말년에 잡간 충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방 호족 중 한 사람이었는데, 무력으로 금관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성주장군이 되었다. 그 아래 아간 영규가 있었는데, 장군의 위엄을 빌려 종묘의 제사를 빼앗고 함부로 제사를 지냈다. 영규가 단오날을 맞아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 없이 무너져 깔려 죽고 말았다.

 성주장군 충지는 향과 등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겠다고 하며, 3척 교견(鮫絹)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모셔다 두고 아침저녁으로 경건하게 받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지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서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자, 성주장군 충지는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들어 사당으로 가서 불태워버렸다. 충지는 자신이 영정을 공양하는 것이 사당의 위령의 진노를 샀다고 생각하였다. 영규가 이미 죽었고, 자신 또한 두려워 영정을 불태웠으니,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 때문에 장군 충지는 수로왕의 직계 자손인 규림을 불러 그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이 후 규림은 88세의 나이로 죽어, 그의 아들 간원경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한 번은 사당을 배알하는 단오일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친 증세로 인해 사당에 나타나 간원이 차려 놓은 제수를 치우고 자기의 제수를 차려 제사를 지냈다. 이 때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일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 죽고 말았다. 그러기에 영규와 준필 이들 부자를 보고는 옛 사람들이 "분수에 넘게 지내는 제사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낳는다."라고 말했다. 

 

 

 재물의 눈 먼 도적들, 금지된 선을 넘다.

 

 도적들은 사당 가운데 금옥이 많으니 언젠가 와서 훔쳐가려 하였다. 이들의 도둑질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모두 좌절된다. 도적들이 처음 사당에 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는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면으로 비 오듯 활을 쏘아 도적 7,8명을 맞혔다. 그러자 도적들은 달아났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왔을 때는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이 물려 죽었다. 겨우 죽음을 면한 도적들은 모두 엎어지고 흩어졌다. 능원(陵園) 안팎에는 항상 신물이 있어, 그 곳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건안 4년 기묘년에 처음으로 세워졌지만, 쌓아올린 깨끗한 흙이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배열해 놓은 여러 옥 조각도 무너지지 않고 전한다고 한다. 

 

 

수로왕릉에 딸린 밭은 나누어 주자 건의하다.

 

 고려 성종 2년에 김해부 양전사인 중대부 조문선이 수로왕릉에 딸려 있는 밭의 면적이 많으니, 그를 부역을 맡은 장정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건의 했다. 하지만 하늘에서 알을 내려 변해 성스런 임금이 된 후, 158년을 산 수로왕을 삼황(三皇) 이후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왕은 이에 대해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후 선대로부터 능묘에 딸려 있던 전답을 지금 줄여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전사가 다시금 건의를 했다. 그러니,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 두어 옮기지 않고, 절반은 향리의 역정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양전사는 조정의 뜻을 받아 일을 시행하였다. 일이 끝나갈 무렵 양전사는 매우 피곤하였다. 어느 날 저녁 꿈속에서 갑자기 7,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서는 "네가 큰 죄를 지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라고 말하였다. 양전사는 꿈 속에서 그 형을 받고서 아파하다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깨어났다. 이내 그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치는데, 그 병이 조금도 낫지 않고, 관문을 지나다가 죽었다. 그래서 양전사는 토지측량대장에 도장을 찍지 못하였다.

 

 

▲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312번지. 사적 제 73호 수로왕릉  / ⓒ정하영

 

당나라 사람 신체부(辛替否)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허물어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물론, 가야국은 망했다. 하지만 김수로왕릉과 능원, 사당은 신체부의 말이 다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앞서 살펴본 역경 속에서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김수로왕은 왕릉과 능원, 사당을 통해 가야는 망했지만  산 자들에게 권위와 위엄을 들어내고 싶어 했던 건 아닌가 생각 들었다.

 

 분수에 넘치는 제사를 탐내다가 죽은 영규와 그의 아들 준필, 재물에 눈이 멀어 도둑질을 시도하다가 죽은 도적들, 능묘의 전답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죽은 양전사. 이들의 공통점은 산 자의 이기심으로 죽은 자의 영역을 침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죽은 자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의 잠을 방해하고, 왕의 평안을 교란 시킨 이들에게 김수로왕은 죽음을 선사했다. 조상을 받들고 예를 갖추는 자신의 후손이 재앙과 불행으로 죽어가길 기원하는 선조(先祖)는 없을 것이다. 다만, 김수로왕은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에 가려져 선과 도와 같은 진실한 마음의 기준이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여, 교훈을 주고자 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산 자들의 이기심을 먼저 살아간 이로써, 다스리고 깨닫게 해 주고자 하였던 것이 무시무시한 '저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문화재청 대학생 블러그 기자단 1기 정하영